13> 티투스 개선문

2006. 1. 5. 11:30Italy 2005

 

 

 

콜로세움광장과 포로로마노 지역은 로마를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다.

이 지역을 거닐다보면 웅장한 개선문들을 보게 되는데 다른 유적에 넋을 뺏겨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B 나 C로 표시된 개선문은 포커스를 벗어난 앵글에 어부지리로 잡히기도 하지만 A 개선문은 콜로세움을 구경하고 포로로마노로 넘어가는 언덕위에 있어 이동하는 수많은 관광객 틈에서 혼자 멈춰 사진을 찍기엔 용기가 필요해서 이래저래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다.

이 개선문이 그럼 그렇게 무시당해도 되는 것인가 ?     갑자기 궁금해졌다. 

 

 

A : 티투스 개선문. Arco di Titus

                        81년에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아버지와 형 티투스의 에루살렘 점령을 기리기 위해 건설

B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Arco di Settimio Severo 

                        203년 황제즉위 10주년 기념으로 건립

C :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Arco di Constantino  

                        315년 로마제국시대의 마지막 개선문 

 

그랬다.  티투스개선문은 다른 두 개선문보다 훨씬 먼저 생겼기에 덜 화려하고 작지만 팔라티노 언덕위에 서서  백년후 이백년후에 셉티미우스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며 이쳔년을 저 자리에 굳건하게 있었던 것이다. 

 

콜로세움에서 포로로마노로 올라가는 언덕위에 서 있는 오늘의 주인공 티투스개선문.

아치가 하나인 단공식이기에 다른 삼공식 개선문보다 작아보인다      

 

3 일전 비오는날 포로로마노에서 콜로세움방향으로 찍은 사진에 티투스개선문이 잡혔다.

사진 우측 언덕위에 아치가 하나인 조그만 개선문이 티투스이고, 사진 좌측 옆면만 찍힌 것이 셉티미우스 개선문

  

2005.12.31 이날은 겨울비가 내렸다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느라 복장이 불량 ㅋㅋ

안사람 좌측에 옆면만 보이는 것이 콘스탄티누스개선문. 우측에 언덕위에 티투스개선문


노성두작 " 유혹하는 모나리자' 의 티투스개선문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기원후 71년 6월의 어느날 새벽. 로마근교 마르스 들판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해오름과 더불어 개선식이 시작될 참이었다.  

예루살렘이 함락된건 한 해전. 원정군 사령관 티투스는 끝나지 않은 유대와의 전쟁을 부하들 몫으로 남겨두고  때맞추어 로마에 귀환했다.  전리품 수례가 무려 수백대. 산더미 같은 약탈물과 성전 보물들 가운데 팔이 일곱 달린 거대한 황금촛대와 통금으로 빚은 탁자가 행렬의 맨 앞줄에 섰다. 흰털이 눈부신 황소 120마리도 뿔에다  금을 입혔다.  

미리 압송해둔 건장한 전쟁포로 700명과 함깨 승전의식을 위한 제물이었다. 병사들은 무거운 군장일 벗고 비단옷을 걸쳤다. 개선수레에 오른 티투스는 자줏빛 홍포에다 누런 월계관을 썼다.  붉게 칠한 개선장군의 얼굴은 피를 뒤집어쓴 아귀처럼 끔찍했다. 해방노예가 수레 뒤에 올라타서 악귀가 근접하지 못하도록 연신 큰 소리를 외쳤다 “ 기억하라, 너도 한낱 부질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윽고 승리의 우렁찬 합창에 발맞추어 수레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렬의 목적지는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 원정을 떠나기 앞서 승리의 서원을 올렸던 곳이다. 마르스 들판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4km. 강변의 야채시장과 가축시장을 거쳐 막시무스 경기장을 관통하고 로마 공회장을 가로지르면 가파른 카피톨리노 언덕에 이른다. 천천히 걸으면 서너 시간쯤 소요되는 거리다.  

유대사제 출신인 요세푸스는 “그날 로마 시민 가운데 집에 붙어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썼다. 그의 실감나는 기록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로마의 개선식이 어땠는지 별로 아는 바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 로마 인구는 팔십만에서 백만가략인데 구경꾼만 오륙십만은 웃돌았을 것이다. 군열에서 울려퍼지는 쇠북과  피리소리에다 연변에서 시민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자못 왁자했다.

티투스가 죽은후 티투스개선문이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