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5. 18:00ㆍAustria 2015
현주 걱정할까봐 가볍게 말했지만, 속마음은 No-show한 숙소 환불건과 당장 오늘밤 노숙은 피해야 한다는 걱정으로 무겁기만 했다.
동네 안으로 차가 간간히 들어올 때마다 유심히 지켜보지만 모두 무심히 지나쳐 갈 뿐이다.
체념하고 화단을 내려와 우리 차로 향하는데 그 순간 차 한대가 지나갈듯 하다 숙소앞에 잠깐 멈추더니 조수석에서 한 아줌마가 내렸다,
동년배로 보이는 운전석 아줌마랑 예의 수다 떨고 돌아서다 우리를 보고는 단 걸음에 마당을 뛰어 올라왔다. 초면에 인사도 없이 덥썩 우리 손을 잡고 '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며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 내남편 안왔었냐 ? ' 는 약간의 변명을 들으니 아까 개 데리고 온 아저씨가 생각났다. 인부가 아니라 이 집 가장이었는데 아무리 말이 안 통한다 해도 그리 무용지물이었을까 ?
우연하게도 우리 방이라고 안내한 곳은 화단 벤치에 누워 기다리던 바로 호실이었다.
현주는 아줌마가 내일 아침 식당을 알려 준대서 올라 갔다 오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짐을 풀었다,
주인아줌마가 나이가 들었어도 화사한 미인형인데, 방도 그처럼 깔끔했다,
샤워하고 나와 집에 카톡으로 안부 전한 후에 현주에게 제안했다
" 밤에 맥주 사다 먹자 ! "
아까 억지로 시간떼우려고 노숙을 했더니. 정작 낮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눈만 말똥말똥하다
동네가 고급지니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겠단 기대를 품고 나온 시간은 6시.
초저녁이지만 아직도 한낮처럼 눈부신 알프스 산자락.
짐을 부려 가벼워진 경차를 타고 구르듯 아랫마을까지 내려왔는데 눈에 먼저 띈 건 레스토랑보다 큰 마트였다,
언제 닫을지 모르니 일단 생필품이라도 사 놓으려고 주차장에 차를 대고 얼른 뛰어 들어가자마자,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 장봐서 집에 가 해먹자 ! "
배가 고프니 보이는 모든게 다 먹음직스러워 본격적으로 저녁거리 될만한 걸 쓸어 담았다.
시식한 햄도 맛있어 ' 조금 포장해 달라 '고 하고
분명 다 먹기도 전에 꽐라 될 맥주도 大자로 사고
전채요리부터 후식까지 정식 풀코스로 세팅했더니 24.15 유로 (30,409 원)
' 오늘 저녁 레스토랑 갔으면 이 돈으로 한사람 밥값도 안될 거 '라는 뿌듯함을 안고 마트를 나왔다.
두 손으로 박스 들고 있는 현주에게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현주 Laptop 박스에 푸짐한 저녁거리를 보니 어릴때 추억이 떠올랐다,
과자 한봉지, 껌 하나도 귀했던 국민학교때, 종합선물세트는 지금의 무엇과도 비교할 게 없는 최고중의 최고였다,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 ? 심장을 두근거리며 열어보면 ... 계란과자, 사루비아와 청포도사탕과 스페아민트껌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우리집에서 구멍가게를 해봐서 내가 잘 아는데 그게 그렇게 자주 팔리는게 아니다보니 유통기한 개념자체도 없었다. 그치만 남은 박스로 딱지를 만들어 나가면 애들이 그거 따 먹으려고 아주 환장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인용사진>
그렇게 종합선물세트라도 받은 양 신나서 얼른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데 산에서 차들이 계속 내려왔다.
기다리다못해 살짝 빈틈사이로 차선을 넘어 갔더니 마주 오던 차가 크락션을 울렸다.
' 급하다, 급해, 어여 가자 !! "
●
숙소 주차장엔 아까 없었던 차가 한대 세워져 있고, 우리 바로 옆방에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얼핏 보니 뚱뚱한 새댁이 발코니 안쪽 깊숙히 앉아있고 두 애가 앞마당 풀밭에서 놀고 있다
일단 사온 걸 베란다 식탁에 쫘악 깔았다
아까 주인 찾아서 숙소를 둘러보다가 전자레인지를 봐 놔서, 햇반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아줌마가 안쪽 방 책상에 앉아 뭘 적고 있다,
" 전자레인지 좀 쓸 수 있어요 ? "
아줌마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데리고 1층으로 내려와 조그만 방을 알려줬다.
우와, 대박 ~ 그 곳엔 전자레인지와 세탁기,싱크대 안에 양식기세트까지 싹 다 갖춰져 있었다. 아줌마가 친절하게 ' guest kitchen ' 이라며 편히 쓰라고 하고 올라 가셨다. 따끈따끈하게 갓 지은 햇반을 들고 방으로 가서 놀란 현주를 게스트 키친으로 데리고 갔다.
현주가 서랍들을 열어보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일단 폰으로 Back music을 은은하게 깔고
사과와 블루베리와 올리브 샐러드와 햄과 돈가스... 맥주와 음료수, 거기에 쌀밥까지 진수성찬을 차려 놓았다.
이 자리에 앉아, 오늘이 최악의 날이 되지 않을까 불안에 떨던 때가 바로 몇 시간전이었는데, 이번 여행중 가장 행복한 저녁 만찬이 시작되고 있었다
숲속에 캠핑 온 것 같은
깨끗한 공기
웅장한 산들과 깊은 계곡
산등성이 듬성듬성 파란 풀밭,
산꼭데기는 워낙 높아서 수목한계선을 넘었고 겨울엔 눈이 덮여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 경치를 바라보며 먹는 저녁은 다 맛있었다. 질러탈에 들어와 이런 시간을 갖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새들은 울지 않았고 소들은 불평하지 않았고 산속 짐승들은 신음하지 않았다.
이 계곡의 모든 생명들은 노래하듯 소리를 냈다.
아무리 음식이 훌륭해도 신문지를 깔고 손으로 집어 먹었음 남들보기 추례했을텐데
깨끗한 접시를 앞에 놓고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으로 잡고 있으니 19세기 러시아 귀족으로 빙의가 되었다.
우리가 호들갑을 떨며 만찬을 즐기자 옆칸 새댁도 질세라 방안에 먹을거리를 다 꺼내와 식탁을 매꿨다.
애들 군것질거리까지 다 동원하는게 안쓰러워 우리 음식을 좀 나눠 주고 싶은데 괜한 오지랖인거 같아 자중했다
후식으로 찐한 우유가 듬쁙 들어간 커피에,
잘츠부르크 특산품이라는 모짜르트 눈깔 초코릿으로 입가심까지 !
8시가 넘어가자 산위에 걸쳐놓은 햇볕자락이 급격히 걷히고, 시원한 산바람이 계곡을 타고 내려온다,
옆칸은 애들이 일찍 잠들었는지 조용하다
새댁만 혼자 어두운 구석에 앉아 와인을 홀짝 거리며 어둠이 깃드는 알프스의 산속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다
마을에 불이 하나 둘 켜지고, 차의 궤적이 길어지는 깊은 밤이 되자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얇은 단벌로 버티던 나는 추워서 슬슬 눈치보며 방으로 들어 왔는데, 현주는 행복과 낭만에 마냥 취해 들어올 생각이 전혀 없다.
이 밤에 두여자가 뭔 청승인지 ... 알프스는 밤에 여자를 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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