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21. 15:00ㆍTunisia 2015
사막 한가운데에 신기루처럼 갑자기 큰 도시가 나타났다.
튀니지 카페에 원래 남자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여기 갚사 초입에 카페에선 넓은 앞마당까지 남자들이 하나가득 앉아 있었다.
알록달록 잘 차려입은 관광객들이 아니라 강한 볕에 얼굴이 검게 그을린 현지인들이 무채색의 두꺼운 방한복에 모자까지 뒤집어 쓰고 모여 있었다. 카페를 끼고 우회전했다.
중앙분리대가 있는 왕복 4차선 대로는 차들이 꽉 들어 차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더 느렸다.
시선을 어디에 둬도 다 사람들이다. 특별한 장날 같지도 않은데 거리건 시장골목이건 공원앞이건 남녀노소가 다양하게 바글댔다.
원색 옷을 입고 카메라를 들고 신기한 듯 두리번 거리는 내가 눈에 쉽게 뜨였나보다.
한 소녀가 오빠 뒤에 숨어 나를 손가락질했다.
오늘 아침부터 일정이 틀어져 이른 시간에 갚사까지 오게 됐으니 로마 수영장 (picine du roman) 유적지나 보며 하루 쉬어 갈까 했었는데 도무지 내려서 숙박지를 찾을 엄두가 안났다. 그냥 빨리 이 도시를 탈출하고 싶다.
갚사의 大腸을 숙변처럼 삐져 나와 드디어 거리가 한결 -여기 수준으로-한적해졌다. 루아지가 속도를 내며 비포장길을 달려 다리밑으로 들어갔다. 이 도시는 다리밑 공터가 루아지 터미널이었다. 요금 2.7 dinar (1,620 원)
화장실을 찾아갔는데 그 앞에서 아저씨가 0.2 dinar (120 원) 씩 사용료를 받고 있었다.
적선하듯 동전 두개 주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휴지도 없고 바닥도 질척댔지만 그래도 돈을 받으니 개판 5분전 화장실 정도는 아니였다
카이세린行 표 7 dinar (4,200 원) 끊고 루아지 확인한 후에 근처에 매점을 찾아갔다. 어짜피 점심을 제대로 못 먹고 계속 차만 탈 것 같아서 요기거리라도 사야겠다. 베르베르인으로 보이는 젊은 엄마가 애를 데리고 장사하고 있었다. 요구르트 1 dinar (700 원) 하나 사서 차로 왔더니 아저씨가 다른 차로 날 데려가 기사에게 인계 했다. 기사가 계속 뭐라 묻는데 내가 못 알아듣고 아저씨를 처다보자 괜찮다고 그거 타라고 눈짓했다. 왜 빈 자리가 남은 루아지를 놥두고 나에게 다음 차를 타라고 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노인과 손주벌 되는 청년. 그리고 나, 세명을 마지막으로 아무도 안 온다.
" 스팍스팍스팍스아이스박스 " 스팍스 (Sfax) 가는 차도 손님이 안 채워지자 기사가 열심히 모객을 하고 있다.
갑자기 여자들이 몰려 와 인원을 다 채우게 됐는데 타기를 머뭇거리며 기사에게 이야기를 했다. 기사가 앞에 두 남자를 내 옆에 앉게 하고 1,2 열 모두를 여자들만 앉혀 출발했다.
루아지가 터미널을 나와 언덕을 올라 돌산을 돌아 나오자 거대한 주거지가 발 아래로 펼쳐졌다. 갚사 북쪽 구릉을 덮고 있는 빈민가로 보였다. 이렇게 뒤쪽으로 큰 도시인줄은 몰랐다.
인구 23만명 갚사의 대부분 주민들은 베두인 (Bedouin)족이었다. 지난번 따따윈에서 본 베르베르 (Berber)인과는 전혀 다른 족속이다. 베르베르인은 튀니지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원주민이고 베두인족은 사하라 사막을 떠도는 유목민이었다. 대표적인 부족이 투아레그(Tuareg) 족이다. 그 이름을 차용한게 폭스바겐 사륜구동 차량 투아렉이다
루아지는 로터리를 돌아 갚사를 떠나 카이세린을 향해 달린다.
루아지는 빠른 속도로 쉬지 않고 달리는데 왼편으로 척박하고 날카로운 돌산들이 수십 km, 수십분이나 계속 따라왔다. 지도에선 갈색의 조그만 흙더미 정도로만 보이는데...
끈질기게 따라오던 산맥도 서서히 땅속으로 머리를 박더니, 흔적없이 사라지고 누런 황무지만 계속 되었다.
마을 입구 조그만 카페 앞에 차가 멈췄다.
모여서 뭘 먹고 있던 남자들이 기사에게 먹어 보라고 권했다. 기사가 안에 구멍가게로 가 물과 먹을 걸 사와 뒷자리 아가씨에게 넘겨주고 다시 출발했다. 아가씨가 심부름을 부탁했나보다. 튀니지의 루아지 기사는 승객들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데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극진한 써비스도 없다.
호쾌한 드라이브길이 계속됐다.
갚사와 카이세린 중간에 텔렙트 (Thelepte) 라는 도시를 통과하고 있다.
튀니지에서 본 도시와 동네중 가장 못사는 곳이었다. 내 맘이 다 아플 정도였다. 나 어렸을때 축구공 농구공 하나 갖고 있는 것도 사치였듯 여기 동네 남자애들은 축구공 하나 없이 공터 여기저기에 모여 있었다. 스포츠도 배가 부른 후에 하는 것이었다.
유치원생 정도되는 누나와 남동생이 철길을 건너가다 동생이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다.
금방 못 일어나자 누나가 옆에서 부추겨 주고 있다.
갚사와 텔렙트 그리고 잠시 후 도착하는 카이세인... 이 튀니지 중서부 지역은 완전히 소외됐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농작물이 부족한 사막기후도 한 원인이겠고
튀니지 혁명의 시발점이 된 이유도 있을거고,
아랍인이 아닌 소수민족이란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지역이 산채로 버려진 역사적 사건이 있었으니... 1943년 2월 롬멜장군으로 유명한 독일과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남의 땅에 와서 전쟁을 벌인 것이다. 고대도시와 주민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지역의 대치상황을 아래 지도에서 찾아 볼수 있다
<인용사진>
갚사와 카이세린 지역의 전황을 설명하고 있는 사진
<인용사진>
몇 시간을 넘겨 달리자 주변 풍경들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민둥산에 나무들이 드문드문 박히는가 싶더니 푸른 밭이 카펫처럼 들판을 수 놓다가 소나무 숲도 만났다.
튀니지는 4개의 큰 관광 카테고리를 갖고 있다.
아랍 문화 (튀니스,수스등),
유럽의 휴양문화 (함마멧, 씨디부 사이드등),
사하라 사막 (따따윈, 토주르등),
로마시대 유적 (엘젬, 수비틀라등) 으로 나눌 수 있다.
그래서 더 다채로와 매력이 있다. 사막 여행구간이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
카이세린 (Kasserine) 에 도착했다,
도시 입구부터 경찰들이 깔렸다. 알제리 국경이 가까워 더 경계가 삼엄한가보다. 오는 비행기에서 바쉬르가 갚사와 카이세인은 친히 X 표를 치며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말렸던 이유를 알거 같다. 그래도 난 여기 올 운명이었나 보다.
옛날에는 부유했던 도시 티가 났다. 큰 관공서도 많고 스타디움도 있고 보도블럭마저 화려했다.
푸른색 띠를 두른 루아지 정류장 앞에 차가 섰다. 몇 사람이 내리고 차가 다시 출발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앞에 기사에게
" 혹시 여기서 수비틀라 가는 거 맞아요 ? " 하니 그렇다고 해서 그럼 나도 내리겠다고 다급하게 말했다.
사거리를 건너자마자 기사가 친히 내려서 뒷문을 열고 앞 의자를 젖혀주었다. 차가 고물이라 내쪽에선 의자를 젖힐수 없었다. 내리며 다시 확인차 물어보니 이번엔 또 아니라고 하는게 아닌가 !
그때 앞열에 앉아있던 아가씨들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 우리도 스비틀라 가니까 같이 가면 돼요 " 그 말을 듣자 급안심이 되었다.
잠시후 정류장에 도착했다. 같이 따라 내리자 아가씨들이 주저없이 길 건너 루아지로 가서 기사에게 확인 후 나에게 건너 오라고 손짓을 했다. 가보니 우리 셋이 첫 승객이었다.
배낭 내려놓고 난 다시 길을 건너 노점상에게 생수와 쥬스와 과자를 넉넉히 샀다. 3.25 dinar (1,950 원)
차에 와 아가씨들에게 건네 주자 첨엔 사양하더니 환한 얼굴로 받았다.
" 수비틀라에 호텔 많아요 ? "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 혹시 Jeunesse (불어로-청춘) 호텔 알아요 ? " 그건 모른다고 한다.
잘하면 아가씨들에게 싸고 좋은 호텔도 소개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한 남자가 와서 뭐라 하니까 아가씨들이, 루아지가 바꼈다고 후다닥 내려 담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얼떨결에 따라갔더니 8명 손님이 급조되어 수비틀라 (스베이틀라 Sbeitla)를 향해 출발했다
왼편의 흰선은 알제리와의 국경선이다
<클릭하면 확대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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