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21. 08:00ㆍTunisia 2015
지금껏 여행기에, 내 영혼 없는 증명사진을 올리거나 쎌카를 찍는 일이 전혀 없었는데 이번 여행에선 매일 아침에 꼭꼭 기억해서 셀카를 찍는 이유가 있다. 바로 수염 때문이다.
생전에 꼭 한번은 수염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이틀이 멀다 하고 발본색원했던 지난 날들에 용서를 빌고 내 몰골이 노숙자로 변하던, 빙딱같은 사진이 공개 되건 수염에게 맘껏 자라는 자유를 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야 되서 밤잠을 좀 설쳤다.
한국에선 매일이 똑같이 반복되니까 일어나기 싫은데, 여기선 매일이 다르고 예측이 불가능한 일들의 배열이다. 일어나기 싫어 늦잠을 자는 것 자체가 낯선 일일 정도니까. 불안,설레임,흥분,호기심 등 모든 감정을 조금씩 짝어 먹어가며 후다닥 일어났다. 무의식적으로 배낭을 꾸려 나오며 방문을 살짝 열어 놨다. 화장실이 건물 내부에 있다보니 환기가 안돼 눈이 매웠다
8시쯤 식당에 갔는데 손님이 한명도 없고 아저씨만 콧노래를 부르며 식탁 세팅중이다.
바게트에 잼 발라 열심히 칼로리를 보충해뒀다. 여행나오면 피부가 두터워지듯이 이젠 이런 거친 아침상에 혀가 적응되고 있다
가급적 빨리 아침을 먹고 배낭 매고 로비쪽은 처다도 못 보고 얼른 계단을 내려와 밖으로 나왔다,
눈부신 햇살이 토주르의 동쪽 얼굴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택시를 잡아 ' 메틀라위 루아지 ' 를 가자고 했다. 혹시 몰라 ' 레자드 루즈 ' 라고 보충설명도 해줬다.
택시는 내가 토주르에 처음 발을 딛었던 그 골목으로 꺽어져 안으로 더 들어가더니 다 왔다고 내려주었다 0.7 dinar (420 원)
루아지들이 담 안쪽 공터애 과묵히 그리고 빼곡히 들어 차 있었다.
TOILET 이란 글자가 더 어울릴 것 같은 TICKET 파는 곳에서 메틀라위행 표를 끊었다. 3.65 dinar (2,190 원)
차를 보니 완전 고물인게 ' 이 차가 내 영구차가 될 지도 모르겠다 ' 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사고나도 부상자는 한 명도 없이 다 사망할듯 ...
루아지안에는 할머니들이 먼저 앉아 계셨다.
오늘 같은 날, 이 이른 시간에 메틀라위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 레자드 루즈 기차 시간에 맞춰 제 시간에 도착이나 할래나 ? ... 고민하는데 막판에 두세명이 몰려와 8시 20 분 조금 넘은 시간에 기적적으로 차가 출발한다. 기사에게 ' 레자드 루즈 기차역에 내려 달라 ' 고 부탁했다.
장님들이 길을 건너고 있어 차가 잠시 기다려줬다. 그림 하나가 생각났다,
피터 브뢰겔 (Pieter Bruegel 1525-1589) 의 「장님의 우화」
<인용사진>
루아지가 골목을 빠져 나와 버스터미널 앞으로 좌회전해 나가는데 뒤에서 할머니가 뭐라고 하시자 기사가 되묻더니 바로 길옆에 차를 세웠다.
내려서 길을 건너가 몇분후 돌아와 할머니에게 조그만 물건을 건넸다. ' 무슨 멀미약이라도 사나 ? ' 봤더니 전화카드였다.
노인을 공경하고 약자를 도와주면 나중에 자기도 그렇게 배려를 돌려 받을 거라는 사회적 약속, 믿음이 보기 좋았다
토주르를 벗어나자마자 군인들의 거미줄에 걸렸다,
내 여권복사본은 대충 보고 돌려주고, 다른 사람들 거는 다 가져가 한참 조회한 후에 돌려 주었다.
대단한 실망인데... 그들 눈엔 내가 테러리스트의 자격도 안되나보다.
겨울이지만 도로 바로 옆에선 나무심기가 한창이다.
먼지만 나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심고 급수차가 물을 나눠 주고 있었다. 꼭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보는 것 같다
오아시스가 있는 곳엔 마을이 깃들어 있다
기사아저씨는 가는 내내 코란 읽어주는 방송만 틀어 놓았다
들개만 돌아 다니는 살벌한 황무지를 지나자
북쪽 지평선 위로 낙타등같은 산맥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실패했지만 토주르에서 사륜차량을 빌려 타고 저 산속을 휘젓고 다니려고 했었다. STARWARS 나 English patient 영화를 거기서 찍었다. 감정몰입하려고 한국에서「잉글리시 페이션트」책도 열심히 읽고 왔는데 ...
영국환자인척 하는 첩자 알마시,
맘은 알마시를, 몸은 킵을 사랑하는 백인처자 해나,
식민지 인도에서 차출되어 온 폭팔물제거반 킵,
그리고 바람난 유부녀 캐서린 클리프턴도 모두 안녕 ~
<인용사진>
<인용사진>
산맥아래로 오아시스 야자숲이 검은 띠를 형성하고 있었고 그속에 메틀라위 (Metlaoui)가 허옇게 보였다
여기도 나무 심는 사람들이 보이고 도시 입구를 군인들이 막아섰다.
모델같이 늘씬하고 아리따운 여자군인에게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도시로 들어가며 중간중간 승객들이 내리고
기사도 잠시 차를 세우고 잠깐 건너 갔다 오더니
나만 태운채 시내를 더 관통해 좌회전, 저 끝에 기차역이 보였다. 나를 위해 일부러 이 안쪽까지 와 준 것이었다
역 안엔 아무도 없다
플랫폼으로 나갔다.
루아지 기사는 날 따라 나와 누구랑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갔다
물어볼 사람도 없고 내가 서성이자, 안쪽 사무실 책상에 앉아 한참 전화 통화중이던 중년여자가 날 부른다.
어쩐 일이냐고 해서 10시에 출발하는 레자드 루즈 (Lezard rouge- 붉은 도마뱀)를 타러 왔다니까.
" 레자드 루즈 ? 오늘 없는데 ! "
" 내일은요 ? "
" 내일도 없어 "
그러면서 예약하라고 무슨 전화번호를 적어준다. 나 폰 없다고 했더니 밖에 있는 남자를 신경질적으로 소리쳐 불러 물어보더니
" 금요일 날 있는데 그것도 확실치 않다 " 는 것이다
원래 기차가 출발한다는 10시도 안됐는데 난 실망한채 어깨를 축 늘어 뜨리며 나왔다.
이걸 타려고 얼마나 설레발을 쳤는가, 페키지 비싸다고 혼자 이렇게 일찍 일어나 토주르에서부터 찾아 왔는데...
역앞에 서서 한숨을 쉬며 ...저 멀리 큰길까지는 걸어 나가야 되고, 그 다음은 어디 갈지도 정해진게 없고... 그렇게 멍하니 계단에 서 있는데
아저씨가 나와
" 한 두사람으론 안돼. 단체 예약이 있어야 운행하는거야 " 라며 날 위로했다.
레자드 루즈, 붉은 도마뱀은 그렇게 날 피해 도망가 버렸다.
토주르에서 전인권 아저씨 말도, 여행사 남자 말도 맞는 말은 아니지만 틀린 소리도 아니였다. 레자드 루즈는 여행사들이 모객하고 요청하면 운행하는 부정기 기차편이었다, 우리같은 개별 여행자는 그야말로 운에 맡겨야 하는 것이다. 여행사나 철도청이나 누군가 총대를 매고 정기적으로 만들지 않은 이상 나같이 축 처진 어깨로 돌아가는 여행자는 계속 있을 것 같다.
풀죽은 목소리로 루아지 터미널을 물어보니, 택시타고 가야 되는데 저 큰 길까지 가야 택시가 있다고 한다.
돌발 상황을 숙명으로 받아 들이며 터벅터벅 역전 마당을 질러 가는데, 오른편 길에서 차 한대가 나오다가 창문을 열고 아저씨랑 이야기를 한다.
그러더니 나를 불렀다. 아저씨가 차주에게 날 루아지터미널까지 태워주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운전수 아저씨가 차 문까지 열어주며 타라고 한다
터미널에 도착해보니 아까 토주르 루아지 기사 아저씨가 잠깐 내린 곳이다. 여기가 종점인데 날 기차역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정류장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하고 온 거였다. 그냥 가는 길에 잠깐 들린 줄 알았지,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고마운 산적 아저씨.
자가용으로 날 태워다 준 아저씨에게 감사하다고 사진 하나 찍어도 되냐고 여쭤봤다.
카메라를 보며 살짝 긴장한 아저씨.
일단 정신을 좀 차리기 위해 루아지 터미널 옆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남자 둘이 운영하고 있는데 둘 다 첫인상이 별로다. 실내는 자기들이 좋아하는 빠른 비트 음악을 크게 틀어 놓았다
참치 샌드위치랑 음료수 하나 주문 2.7 dinar (1,620 원)
여긴 맛이 없다.
재료는 비슷해도 맛은 큰 차이가 났다. 거기다 팍치까지 들어가 있어서 덜어내고 먹다가 그냥 남겼다
옆 테이블에 흑인남자는 샌드위치를 먹은 후 세면대 물을 받아 벌컥벌컥 마시고 나갔다,
내가 주변 사진을 찍자 팽이머리 남자가 같이 사진찍자고 주방에서 나왔다,
별로 맘에는 안들지만 나 좋다고 저러는데 매몰차게 거절할 수도 없고
터미널이라지만 이건 뭐 완전 길거리 간이 정류장이다, 주변엔 봉고차 같은거 한두대 서 있을 뿐이었다.
갚사 가는 루아지를 물어보니 길건너에 세워져 있는 차 한대를 가리킨다
차가 고급스럽고 깨끗하다 했더니 핸들에 HYUNDAI 마크가 선명하다,
지금까지 탄 루아지중 가장 좋은 차다
이번엔 애기가 당당히 1인 승객수를 채워 출발했다
맨 뒷자리에서 양쪽 덩치에 끼어 몸을 구부린채 실려 간다
오른편엔 지평선 평야, 왼편은 돌산과 협곡들...
지금 이 시간에 붉은 도마뱀 등에 올라타 저 산속을 누비고 있어야 하는 건데 ...
<인용사진>
뭐 사실 특별할 것도 없는 지형이지만, 사막광야만 보다 저런 험준한 산들을 보니 눈길이 가긴 한다
갚사 (Gafsa) 가 가까워 오자 큰 공장들이 몇개 보였다,
튀니지에 와서 첨 본 공업단지다. 갑사 도시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온통 쓰레기가 엉망진창인 갚사 외곽에서 애기와 애기엄마가 내린다.
척박한 주거환경에서 살아 내기에 두 모자는 너무 연약해 보였다,
루아지는 다시 갚사를 향해 출발했다, 이번엔 나를 내려 놓기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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