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31. 09:00ㆍCzech 2015
뭔가 코에서 흐르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깼다.
어둠속에서 검은 빛깔의 액체가 손에 묻었다. 잠결에 비틀거리며 화장실에 가 휴지로 코를 틀어 막았다.
헝클어진 머리, 반쯤 감긴 눈, 코와 턱 주변이 피투성이인 사내가 거울속에 있었다.
한밤중에 한 방에서 한사람은 난리법석인데 한사람은 천하태평이다. 안 깬 걸 다행이라 생각했다가 갑자기 서운해졌다 ...
아침에 세수하면서도 또 한번 코피가 터졌다. 현주에겐 일부러 말을 안했다.
■
지혈이 된 후에 아침을 먹으로 식당으로 나왔다
주방 한쪽 벽엔 뜸금없이 전투기 사진이 걸려 있고,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굳은 얼굴에. 두룩돼지들처럼 거대했다
간밤에 우리가 소비에트 국경을 넘어 온 것인가 ?
예전 이탈리아 여행에서 카페라떼에 눈을 뜬 현주가 이번 여행에선 카푸치노에 푹 빠져 버렸다.
널적널적하게 차려만 봤지 먹잘 건 없었다. 그나마 젤 반가운 메뉴가 모닝커피인데 마침 내 앞에서 커피머신이 멈춰 버렸다. 내 뒤로 역시 커피 귀신들이 빈 컵을 든 채 줄을 섰다. 현주가 사진을 찍길래 귀여운 척 !
아침 식당을 두 여직원이 감당하고 있었는데 한 여자는 빠릿빠릿하게 잘 하고 한 여자는 땜빵하러 온 것처럼 버벅댔다. 버벅대는 여자가 커피머신을 고쳐 본다고 이것저것 만지고 있자 빠릿빠릿한 여자가 커피통을 꺼내 리필하자 간단히 정상작동됐다.
아침을 먹은 후 사람들을 따라 커피 한잔씩 빼 들고 바깥 테이블로 나왔다,
낮처럼 덥지도 않고 오히려 약간 쌀쌀하기까지 한 아침 날씨
느긋하게 모닝커피를 두잔씩이나 마신 후 방에 와 짐 챙기고 체크아웃. 1,100 코루나 (55,000 원) 결재
쿠트나 호라를 그냥 떠나기가 아쉬워 어제 성당에서 내려다 보이던 아랫동네로 방향을 틀었다.
아래에서 올려다 봐도 역시 텐트촌같은 바르보라 성당
할아버지 아들 손주 3대가 아침 일찍 장 본 걸을 나눠 들고 집으로 들어간다
동네를 돌아나오다 냇가 옆에 특이한 집을 발견했다,
길 위로 집을 지어서 길이 터널이 되었다,
이제 미련없이 쿠트나 호라를 떠나 리토미슬 (Litomysl)로 간다
지방도로에서 이유없이 갑자기 차가 막혀도 바쁠거 없으니, 차 안에서 현주랑 수다를 떨며 간다.
작은 도로도 달리고 고속도로같이 뻥 뚫린 길도 달리고... 네비가 길을 잘못 알려줘 이상한 동네도 들어갔다 나오고
기계로 밀을 수확하는 광경
특이한 색깔의 집
그렇게 리토미슬에 도착했을 때는 가장 더운 시간이었다,
차와 길바닥 돌에 반사되는 땡볕에 눈이 부셨다
리토미슬 城이 네비에 검색이 안되어 도로 이정표를 보며 찾아갔다
다행히 큰 길 안쪽에 성이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았다,
1시간 정도면 될거 같아 25 코루나 (1,250 원) 넣고 주차권 뽑아 끼워 놓고 정원 너머에 궁전을 향해 들어간다
정문 입구에서 피아노를 치는 할아버지
이 리토미슬성은 1568-1582에 세워졌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하얀 벅돌이나 대리석으로 견고하게 성벽을 쌓은거 같은데 가까이서 보니 좀 이상했다
벽에 석회를 바르고 마르기 전에 긁어내 문양을 만드는 이 기법을 스그라피토(Sgraffito) 라고 부르는데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노동력이 부족해 이런 편법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래도 벽돌마다 문양을 다 다르게 파내는 세심함은 있었다
처마 부분은 스그라피토기법이 오히려 더 멋있었다,
저러다 동상에 깔려 객사하는거 아녀 ?
엉덩이만 쭉 빼고 소심하게...
이 성은 중유럽 귀족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잘 보존된 곳으로 유명하다.
성 안의 생활상을 실감나게 묘사해 놓은 그림판
전자오락실 같기도 하고
마리오네트 인형극 무대 같기도 하고
이 성은 3층짜리 건물 네개를 붙여 만들어진 성이라 가운데에 큰 마당이 생겼다
음악회 판넬 한 귀퉁이에서 반가운 단어를 찾아냈다.
Smetanova
스메타나...스메타나...
그 단어를 되뇌이자 1987년 앞마당에 수돗가가 있었던 신동의 자취방으로 스르르 순간이동되었다.
대학교에 입학하여 지방에 혼자 자취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내 방세 1년치가 선불로 35만원 했던 시절인데 부모님을 졸라 40만원 짜리 오디오를 샀다. 롯데 파이오니아,
앰프와 카셋트 데크, 턴테이블, 튜너가 별도롤 분리되어 있는 컴퍼넌트 오디오. 검은 관같은 스피커엔 냄비뚜껑만한 우퍼가 달려 있있다.
그 당시에 유행했던 오디오들... 인켈, 에로이카, 아남 나쇼날.
80년대는 문화의 전성시대였다. 가요와 팝뿐만 아니라 클래식까지 한 주류를 차지했을 때였다. 학생회관 1층엔 클래식만 틀어주는 음악감상실도 있었을 정도였으니. 대머리 아저씨가 비닐가방을 옆에 끼고 자주 우리 자취방에 들르곤 했는데 그 삼성출판사 아저씨 꾐에 빠져 할부로 클래식 LP판 전집을 사게 되었다. 그 안에 스메타나가 있었다. 물론 다 듣지도 못하고 지금까지도 창고에 처박혀 있지만...
" 지금 몇시게 ? " 현주에게 재차 물었더니 귀찮다는 듯
" 몇신데 ? "
" 12시 15분 ! "
" 어떻게 알아 ? "
" 엉 저 해시계 ㅋㅋ "
주차티켓 시간 넘을까봐 대충 보고 나왔다
입구 피아노 앞에 이번엔 여자애 혼자 앉아 조용히 연주를 하고 있다
방해 안되게 그 옆 카페 같은 곳에 들어갔다가 나오니
피아노가 비어 있길래 현주에게 한 곡 부탁했다
창피하다고 언능 찍으라는데, 난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 무엇이 무엇이 똑 !... '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건반을 두드러던 손가락이 갑자기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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