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22. 10:00ㆍPhilippines 2013
공수병이 있는 내가 다이빙팀과 이 섬에 왔다면 강제로 할당된 빈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Sabang 이 따분한 유배지가 될지 판타스틱 어드밴쳐가 될지 결정될 것이다.
세째날 오전은 뭘 하면 좋을까 궁리하다가 스쿠터 빌려 섬 주변을 쏘다니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공수병 동병상련인 작은 형님에게 얘기를 꺼냈더니 당신도 지난번 오셨을때 그렇게 하셨다고 무용담을 들려 주셨다. 그러시면서 위험하다고 자꾸 강조하셔서 날 불안하게 만드셨다.
오늘 아침에 운희형에게 계획을 상의했더니 작은 형님은 스쿠터가 익숙치 않으시다고 알려주셨다. 그래서 두 형님에게 내가 스쿠터를 빌려야 하는 당위성을 피력하고 혼자라도 다녀오겠다고 말씀을 드리니 이해해 주셨다. 아 이제 내 맘껏 이 섬을 접수해야지 하는 설레임도 잠시...길도 잘 모르고 사고나면 연락해줄 사람도 없다는 불안감이 해무처럼 밀려왔다.
아침 먹고 김실장의 지인인 개롤 (원래 Carol 인데 모두 개롤, 개롤하며 놀린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Sabang 주변에 갈만한 곳을 물어보았다. 폭포와 화이트비치를 추천하더니 자기가 가이드를 해 주겠다는 순간 가슴속에 꽉 찼던 해무가 일거에 싸악 걷히고 파란 하늘이 열리는 거 같았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즐거운 여행의 관건은 내 의지가 아니라 신의 가호나 운이 팔할이었다.
찐한 썬그라스 하나 걸치는 것으로 준비 끝 !
길을 나섰다.
날씨마저 화창해서 발걸움이 절로 가벼운데
저 사람들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운지 아예 물위를 걷고 있다.
호객꾼들이 몰려 있는 사거리에 도착하기 전에 개롤에게
" 외국인인 나보다 당신이 직접 빌리는게 나을거 같아 " 하며 500 peso 한장을 주었다.
그런데 그런 잔머리가 소용 없어졌다.
골목을 돌아 나오는 우리 둘을 보고 필리피노들이 오토바이 사진을 흔들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렌트비는 기본 3시간에 400 peso, 이후 시간당 100 peso 라고 한다. 500 peso (12,790원)을 미리 다 주었다
속으로는 싸네~ 란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서 며칠만 더 생활하면 그것도 부담스런 돈이 되겠지.
시동이 잘 걸리는 신형으로 달라고 부탁했더니 당연하다는듯 웃는 얼굴을 하고 언덕쪽으로 뛰어갔다
잠시후 하얀 스쿠터를 하나 끌고와 조잡한 헬멧을 나눠주고 시동요령과 주유구 위치를 알려주었다
헬멧을 머리에 쓰고 시동을 걸고 개롤을 뒤에 타라 하고 ...긴장되는 맘으로 손잡이를 돌리자 드디어 스쿠터가 앞으로 움직였다
지프니와 원주민과 관광객들이 바글대는 이 복잡한 길만 탈출하면 그 이후는 운전이 쉬우니까 안전을 최우선으로 천천히 마을을 빠져 나왔다
엇그제 바탕가스(Batangas)에서 쪽배를 타고 건너왔지만 사실 이 민도로 (Mindoro) 섬이 만만한 섬이 아니다.
면적이 경상남도 만한데다 섬의 한 가운데는 높은 산맥이 oriental과 occidental 의 분수령이 되고 있어서 동서의 왕래도 쉽지 않다.
※ 오리엔탈, 오시덴탈이란 단어를 동양인에게 쓰는 경우는 좋은 뜻보다는 약간 비하의 의미를 품고 있다.
민도로섬에서 우리 위치는 북쪽 끝에 쥐젓처럼 튀어나온 곳이지만 관광 포인트는 Sabang beach 주변에 다 몰려있어서 섬을 일주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그래서 오늘 루트는
Sabang beach 에서 Puerto galera 까지 내려와서 좌회전, Tamaraw 폭로를 보고 다시 Puerto Galera 로 돌아와 이번엔 서쪽의 White beach 까지 갔다 올 예정이다. 도로 상황과 정확한 거리를 모르니 시간도 예상할수 없고 늦으면 점심까지 먹고 오는 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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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벗어나자마자 가파른 산길이 계속됐다.
여기저기 깨지고 좁은 시멘트 포장도로인데 오토바이 지프니 자동차가 뒤에서 앞에서 정신없이 지나다녀 위험하긴 했다.
비가 가장 많이 내리는 7,8월에는 길이 미끄러워 위험하므로 육로가 폐쇄된다고 한다. 그럴만 하다
북쪽에서 산을 넘어오자 햇볕이 잘 드는 산의 남쪽 기슭에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Puerto Galera 라는 이 마을은 항구가 있어 주변 관광지의 전초기지로 관광객들이 많았으나, 그 이후 Sabang beach 로 직접 가는 정기선이 생기고 나서는 서서히 쇠락해 가는거 같았다
업데이트 안된 옛 여행책을 보고 온 백인 관광객들만 한두명 보일뿐 ... 사방비치에서 느꼈던 활기가 거의 없다.
푸에르토 갈레라를 지나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계속 내려가자
등뒤로 Sabang beach 가 있는 반도가 보였다.
드디어 Tamaraw 폭포에 도착했다
우리가 빌린 하얀색 스쿠터
폭포사진을 찍으려고 쪼그리고 앉았다
한 프래임에 다 담고는 싶지,
폭포는 장대하지...
카메라 액정만 보며 점점 고개를 들다가
뒤로 발라당 넘어져 엉덩방아를 짛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바지에 온통 흙탕물이 묻어버렸다
폭포를 구경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섹시한 엉덩이에 꽂혔다
그냥 허허 웃지만 속으론 TT ;
폭포아래는 수영을 할수 있는 Pool 이 있는데 물살이 세서 탁하게 보였다,
자연 경관외에는 볼거리가 없는 섬이다보니 여기에도 심심찮게 사람들이 몰리고 있었다,
갈길이 머니 다시 출발.
바람이 거센 해안 언덕위에 풍채 좋게 생긴 거대한 나무
내 헬멧 끈은 고장이 나 있어 고개만 조금 들어도 벗겨져 도로위를 떼굴떼굴 굴러갔다. 개롤이 주워오길 두어번 !
안 되겠다 싶어 벗어 놓고 운전했다.
프에르토 갈레라가 가까워오자 아까 삼거리에서 교통정리하던 경찰이 생각났다. 얼른 뒤집어 썼다. 괜히 트집잡히지 않게.
무사히 프에르토 갈레리를 벗어났다는 기뿐 마음에 깜빡 잊고 머리를 돌렸는데 또 핼멧이 슝하고 날라가 길위를 미친듯이 떼굴떼굴
...뒤따르던 지프니가 아예 멈춰서 버렸다. 개롤이 또 얼른 달려가 줏어왔다.
아, 이 민도로섬은 그냥 민대가리로 다니라는 뜻인갑다 !
드디어 화이트비치에 도착했다.
유료 주차장에 도착해 오토바이를 세우다가 진흙을 밣고 쭐떡 ~
Sabang beach 는 백사장 폭이 좁고 모래가 거친 편인데
White beach 는 Puerto galeta 주변 비치중 해변이 가장 넓고 유흥이 많지 않아 조용히 휴가를 즐기려는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 적합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게이쇼는 화이트비치라는 거 !
사방비치는 앞 바다가 섬으로 막혀 잇는데 여긴 수평선 끝까지 탁 트였다.
어느덧 12시가 넘었길래 점심을 먹으러 해변가 식당에 들어갔다.
일단 망고세이크를 주문했다.
해변을 바라보다 무심코 보게 됐는데 시럽을 반컵이나 들이붓고 믹서기로 갈고 있었다
엄청 달다
볶음면 요리인데...이건 좀 짜서 대충 먹고 남겼다
필리핀에는 레몬이 없어서 대용으로 이 쪼그만 Calamansi 를 쓴다
필리핀 음식에 반찬처럼 따라나오는데, 볶음면같은 경우엔 각 재료들의 강한 맛을 평정하기 위해 이 새콤한 칼라만시를 뿌려먹는다.
식탁아래에선 어느새 왔는지, 고양이가 먹을거 달라고 갸르릉대고 있었다
스쿠터 반납할 시간도 되고 해서 일찍 나왔다
주차비 내고 오토바이 돌리다가 이번엔 왼쪽으로 또 넘어졌다
기름도 약간 새고. 핸들 부위에 흙도 묻어서 휴지로 닦고 탔다. 어디 부딪쳐 부서지지 않은게 다행이다.
이건 뭐 Best driver 긴 한데 Worst walker 라서...
Sabang beach 에 무사히 도착. 올때는 30분도 안 걸리고 금방 왔다
스쿠터 반납하러 갔는데 직원이 없어 조금 기다렸다. 기름도 다 채워서 가져와야 하는건가 ...고민을 하는 순간 젊은 남자애가 나오더니 아무 문제없다는듯 끌고 들어갔다.
야호 ! 오전 한때를 신나게 보냈다.
오늘의 주인공 : 김실장 (김평선)
TED 한국어 번역 강의중 ' 더 행복해지고 싶은가 ? 지금을 즐겨라 ' 를 들은 기억이 난다.
강사가, 인간은 언제 가장 행복할까 ? 를 연구하여 얻은 결론은 :
현재에 집중할 때에 가장 행복하다. 반면 우리가 딴 생각을 많이 할수록 불행해진다. 는 것이었다.
다소 싱겁기도 한 결론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단순하지만 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우리는 맛있는 밥을 먹으며 내일 걱정을 하고 섹스를 하며 벽지 바꿀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웃을 수 있는건 오로지 그 순간만 알기 때문이다. 내일 걱정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실장을 이야기 하려다보니 좀 멀리 돌아왔지만 그야말로 이 강의를 들을 필요가 없는 사람인거 같다.
그는 맥주를 맛있게 마셨고 다이빙만 생각했으며 주판알을 뜅기지 못했다. 매 순간을 고스란히 즐겼고 행복해했다.
그의 목소리는 key를 두 단계 올린 것처럼 높고 빠르고 짧다. 그와 말을 섞으면 내 속에 있는 아드레날린과 도파민과 엔돌핀을 쭈욱 짜서 칵테일 잔에 붓고 신나게 흔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사람을 흥분시켰다.
여행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자 금단 증상처럼 그의 목소리가 땡겼다. 그래서 일주일도 안되어 이번엔 내가 한턱 쏜다고 다시 모였다,
식당으로 가는 차안에서 김실장의 목소리가 다시 듣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은가보다. 김실장을 만나려면 최소 1주일전에는 약속을 해야 한다. 하루 2명씩 만나는 강행군을 지속해도 스케줄은 항상 앞장서 간다고 한다.
이번 일행중 나이는 유일한 30대 막내지만
외모는 유일한 60대 고령자인,
다소 특이한 목소리를 가진 김 실장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은 단 하나,
지금을 즐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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