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MW 성공신화의 비밀 "

2010. 1. 1. 15:14독서

 

 

 

 

 

 

 

 

 

 

    <섣부른 독후감보다는 책 내용 요약본을 발취하는것이 이 책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다>

 

최고의 역사
― 1896년 첫발, 세계 최고의 브랜드를 일구어온 BMW 역사의 흥망성쇄
BMW는 초기에 항공기 엔진을 제작하는 회사로 시작한다. BMW 로고는 바바리아 지방의 푸른 하늘을 나는 항공기의 힘차게 돌아가는 프로펠러를 상징한다.
BMW가 자동차회사로서 첫발을 뗀 것은 1896년 독일 튀링겐 주 아이제나흐 공장에서부터다. 그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격랑과 혼돈스런 인수합병 등의 파란을 겪으면서 BMW는 자신만의 고유한 브랜드 정체성을 확립해 간다. 바로 세계인이 열렬히 추종하는 BMW 브랜드 말이다. 자동차회사로서 BMW의 역사는 1896년 독일 튀링겐 주(州)에 있는 아이제나흐의 작은 공장에서 시작되었다. 그 공장은 첫 해에 600명의 직원을 고용하여 군사용과 민간인용 자전거, 전기로 움직이는 자동차, 가스를 사용하는 내부연소엔진을 생산했다.
1903년, 에어하르트가 회사 경영에서 손을 떼고 윌리 섹이라는 엔지니어에게 경영권을 넘겨주었다. 1914년 전쟁이 발발하자 자동차 생산이 중단되었고, 아이제나흐 공장은 나중에 연합군에 의해 해체된 군수용품 생산 공장으로 바뀌었다. 1차대전 후에는 한때 철도차량 제조업체인 고타왜건파브리크에게 인수되기도 하였다. BMW는 디시 사를 인수하면서 영국 자동차회사 서 허버트 오스틴(Sir Herbert Austin)과 라이선스 계약이 된 오스틴 세븐을 제작하게 된다. 이것이 BMW 최초의 자동차인 것이다.
1923년 독일의 항공기 생산 금지가 해제되자 BMW는 공장을 정상가동시키면서, 자동차를 전문으로 제작하려는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BMW는 나중에 나치당과 히틀러와 관련해 약간의 오해를 살 만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지만, 전후 모든 오해는 풀렸다. 이때까지 1930년대와 40년대 사이 디시3/15의 후속모델인 320과 BMW321, 327 등의 차종과 R32, 35와 같은 모터사이클을 제작하였다. 또한 군수산업과 관련한 기계들을 만들었다. 1951년 BMW는 자동차 사업으로 돌아와서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수많은 명품 차종을 개발해 왔다.

최고의 가족
― BMW 최고 경영을 이끌어온 흥미진진한 이야기
BMW를 이끌어온 것은 독일에서 두 번째 부자 가문인(‘알브레히트 가’ 바로 다음이다) 크반트 가이다. 1959년 전후 한 시기 혼란에 빠진 BMW를 인수하고 1982년에 사망한 헤르베르트 크반트와 미망인 요한나, 아들 슈테판, 그리고 딸 수잔느가 바로 크반트 가의 사람들이다. 크반트 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구조조정에 들어간 BMW를 1959년부터 이끌어왔다.
1959년 BMW를 인수한 헤르베르트의 부친인 군터 크반트는 1930년대에 독일 유수의 회사들을 지배했던 선도적인 사업가였다. 헤르베르트는 군터 크반트의 배려로 외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글로벌 비즈니스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는 특히 미국에서, 독일에서는 아직 굳건한 기반을 확립하지 못한 대량생산과정을 관찰하기 위해 많은 공장들을 둘러보았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동안, 그는 75달러를 주고 시보레 쿠페를 타고 다니다가 110달러를 받고 팔아치운 뒤 독일로 돌아왔다. 이것은 아버지 군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죽을 때까지 헤르베르트를 따라다닌 가장 유명한 일화이다.
헤르베르트와 부인 요한나가 오랫동안 반복해온 일은, 요한나가 남편이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신문과 잡지의 기사들을 크게 읽어주는 것이었다. 결혼 후 22년 동안 매일같이 남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온 요한나는 업계 사정에 정통한 사업가가 되었다. 헤르베르트는 음성 녹음테이프를 통해 계약을 숙지하고 사업을 이끌어나갔다. 그는 수십 년간 목소리의 억양으로 사람들을 평가하는 기술을 연마했다. 그는 전화통화 내용과 사무실에서의 회의 내용을 모두 녹음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용을 파악하고 최선의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BMW의 모델 제작팀에게 모델을 만든 뒤 자신이 직업 손으로 만져볼 수 있도록 사무실로 가져오도록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제일 좋아하는 회사의 사업을 지휘했다.
1980년, 헤르베르트 크반트는 72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요한나가 1997년 포르스탄트(이사회) 위원을 임명하는 BMW 감독이사회의 5인 집행위원회에서 물러나고, 이로써 BMW는 역시 위원회 소속인 슈테판과 수잔느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1966년생인 슈테판 크반트는 BMW 주식과 이사회 위원 자격 외에 다른 사업체도 소유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바트홈부르크에 있는 크반트 사무실의 아버지 책상에서 일을 하며 보낸다. 그는 언젠가 BMW 감독이사회의 의장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군대에서 복무했으며, 그 뒤 경제공학 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 BMW에 대한 연구과제가 많은 보스턴 컨설팅그룹에 입사했다. 1996년 바트홈부르크로 돌아온 슈테판은 다양한 얼굴의 크반트 제국을 경영하면서 아버지가 떠난 자리를 대신했다.

최고의 브랜드 - 최고의 드라이빙 머신
― 본질적으로 차별화된 BMW만의 고유한 브랜드 철학 : 진정성과 일관성
BMW 브랜드와 그들이 브랜드를 매년 관리하고 형성하는 방식을 묘사하는데 가장 자주 사용되는 단어는 진정성과 일관성이다. BMW는 결코 무가치한 가짜를 생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진정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BMW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의문을 갖지 않기 때문에 일관성이 있다.
숙련된 장인의 기술과 재능이 응축된 스포티하고 성능지향적인 자동차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BMW를 정의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전후 15년 동안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동안 회사의 포커스를 다시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1962년 헤르베르트 크반트라는 새 주인이 들어오면서 1500살롱을 출시하여 ‘뉴클래스”가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BMW는 동일한 브랜드 기반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다른 회사들은 대단한 것으로 알려지기 위해 애를 쓴다. 캐딜락은 커다란 엔진이 장착된 안락한 고급 세단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고, 폴크스바겐은 기본적인 독일의 엔지니어링 기술과 외장 디자인이 특징적인 저렴하고 믿을 만한 자동차로 알려졌다. 메르세데스는 탁월한 엔지니어링과 품질, 명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롤스로이스는 흉내낼 수 없는 엔지니어링과 기술을 자랑하는 최고의 자동차였다. 이 모든 자동차회사와 브랜드는, 브랜드 약속과 이미지와 일치하지 않는 제품들 때문에 수십 년간 이리저리 표류해왔다. 수십 년간 자동차업계의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은 버스가 떠난 뒤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처럼 제품을 쫓아다니곤 했다. 더 현명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전략은 브랜드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정체성에 색깔을 입히고 모든 제품과 과정에 스며들도록 하여 브랜드와 제품이 상호의존적이고 밀집 행진법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BMW가 다른 자동차회사를 능가하는 점이며, 다른 업종의 회사보다도 우월한 점이다. 그들은 소비자들을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운전한다고 생각하는 구매자들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지난 40여 년간 BMW는 광고나 브랜드전략 수립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 이 우월성을 유지해 왔다. 또한 BMW 빌딩(글래스 하우스)은 세계에서 가장 멋있고 세련된 고객들을 위한 엔지니어링 지향의 자동차회사라는 인식을 심어준다는 BMW의 목표를 완벽히 완수했다.

최고의 자동차와 디자이너
― BMW 3,5,6,7시리즈와 M시리즈, 그리고 수석 디자이너 크리스 뱅글 등 BMW 5시리즈
3시리즈, 5시리즈, 6시리즈, 7시리즈, M시리즈 등은 BMW의 대표적인 모델들이다. BMW는 2003년 중반부터 2005년 후반까지 최신형 모델을 대량생산하려 했고, 5시리즈는 BMW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 제품공략으로 여겨졌으며, 고품격 자동차의 소비층과 자동차 언론계에 굳건한 신용을 쌓았다. 2003년〈카 앤 드라이버〉는 “5시리즈 모델은 흡수성이 뛰어나고 충격을 최소화하는 승차감을 제공하여 고품격 세단의 쾌적함이라는 측면에서 표준이 되는 모델”이라고 했고, 같은해 소비자 보고서(Consumer Report)는 5시리즈를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자동차 중 하나다.”라고 평가했다. 5시리즈의 판매량은 BMW 연중 판매량의 1/5에 해당하며 수익의 25%를 차지하기도 했다.
6시리즈는 단종될 무렵인 1989년 말까지 8만6,000대 이상 판매되었다. 스타일과 파워로 명성을 얻었던 6시리즈는 20세기 후반의 자동차 디자인을 규정하는 모델로서 몇몇 자동차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전면적인 재디자인 없이 13년간 운행된 6시리즈는 BMW 역사상 최장기 운행모델이다. 6시리즈는 진정한 슈퍼 카로 자리매김을 했으며, BMW의 전형적인 쿠페였고, 다른 자동차회사의 기준이 되었다.
이외 다른 차종들도 BMW의 브랜드 정신을 최대한 구현하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
BMW가 40여 년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목표는 즐거운 드라이빙이다. BMW의 원칙은 “재미있게 만들어라. 무엇을 하든 그것은 즐거워야” 한다는 것이다. BMW가 그 원칙에 전념하기 때문에 언제나 한결같고, 존경을 받는 것이다.
BMW에서 기억해야 할 제품개발 디자이너로는 라이츨레와 루테, 그리고 크리스 뱅글이다. 뱅글은 1992년부터 BMW의 자동차 디자인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뱅글을 고용한 사람은 그 역시 유능한 간부라는 평가를 받았던 전임 제품개발 책임자인 볼프강 라이츨레였다.
BMW의 디자이너 책임자로서, 뱅글은 300명 이상의 디자이너들을 고용하고 관리한다. 뱅글은 자신의 디자인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른 디자이너들이 아직 생각하지 못한 것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예상 가능한 것을 하지 않으며, 과거를 모방하지 않는다.”
1992년 BMW 입사 당시의 디자인 목표는 어떻게 해서든지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었고 모험을 시도하려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1960년대부터 1992년까지 동일하게 유지해온 BMW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는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995년 디자인웍스를 매입한 것은 뱅글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디자인웍스를 BMW의 ‘중대한 정보수집 초소’라고 불렀다. BMW가 그들의 주 고객이었지만, 뱅글은 되도록이면 그들의 기업문화를 존중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는 디자이너로서 뮌헨 바깥에 있는 디자인 회사의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외부의 더 가치있는 인재를 중요하게 여기는 BMW에 의해 발탁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 또한 훌륭한 외부 디자이너의 중요성과 가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뱅글은 입사 후, 디자인 작업실에 엄격한 감독체제를 확립했다. 민감한 모델과, 원형 모델, 모형 모델들을 벽으로 둘러쌌으며, 작업실 문에는 “멈춤:들어오지 마시오”라는 표지를 붙였다. 엔지니어링과 비용분석 직원들은 디자인 직원이 없으면 작업실에 들어오지 못했다. 사실 그들이 안에 들어오면, 디자이너와 모형 제작자들은 거의 항상 밖으로 나갔다. 디자이너가 엔지니어로부터 피드백을 원할 때에는 생산적인 논의가 진행되도록 항상 디자인팀의 리더가 참석했다.
뱅글은 BMW 내부에서 ‘BMW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 개념을 적절한 언어로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사람들이 20야드 밖에서 자동차를 보았을 때 최신식 디자인에 로고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BMW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탑승객의 눈을 가리더라도 그것은 BMW처럼 느껴져야 한다는 것이다.

최고의 경영과 브랜드 확장
― 당신이 이미 미니를 가지고 있다면, 롤스로이스가 두 번째로 이상적인 차가 될 것이다.
BMW는 영국 로버그룹을 ‘비싸게’ 사들이면서, 앞으로 10년간 상당한 운영수익을 내게 될 작고 빛나는 보석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미니였다. BMW가 랜드로버와 로버 브랜드의 인수계획을 세울 때부터, 미니는 계약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BMW가 로버그룹을 인수했던 1994년에는, 영국에서조차 로버그룹을 무대에서 퇴장하는 나이든 록스타처럼 취급했다. BMW가 디자인한 미니 쿠페는 2002년에 ‘올해의 북미자동차 상’을 거머쥐었다. 50명의 자동차 관련 기자들의 투표로 결정되는 이 상을 수상한다는 것은 자동차업체로서는 좀처럼 얻기 힘든 영예였다.
최근 한국에서도 출시된 미니는 고객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음도 미니의 브랜드 가치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다음 내용은〈카 앤 드라이버〉의 미니에 대한 논평이다.

-“오리지널 미니의 가벼운 소형차 느낌은 독일 장인기술이 느껴지는 실질적이며 유능한 특성으로 바뀌었다.”
-“BMW는 미니의 구조가 3시리즈 자동차보다 50% 더 견고하고 경쟁차량보다 1.5~3.0배 견고하다고 말한다. 미니의 작은 크기도 이 점에서 도움이 되었지만, 미니는 차체에 3,800번이나 용접을 했다(훨씬 덩치가 큰 3시리즈의 용접 횟수도 이보다 800회 많을 뿐이다). BMW는 이 견고한 구조물에 다른 차보다 훨씬 정교한 서스펜션을 부착했다.”
-“스포티한 서스펜션 덕분에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를 세게 달리더라도 사실상 보디의 흔들림이 거의 없다. 마치 미니의 무게중심이 도로 1피트 밑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동차의 앞쪽 끝은 표준 15인치 휠과 175/65 고성능 피렐리 타이어와 함께 경이롭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뉴 미니를 구모델의 업데이트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재미, 향수, 천진난만함의 스타일링을 보여주는 최초의 BMW로 여겨야 할 것이다.”
또한 1997년 BMW는 벤틀리와 롤스로이스 브랜드 권리를 놓고 경쟁입찰에 들어가서 결국 롤스로이스 브랜드와 함께, ‘나는 여인’ 후드 마크를 단 제품을 개발할 권리를 얻었다.
롤스로이스와 미니를 추가한 것은 헬무트 판케의 BMW AG 성장 비전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판케의 주문(呪文)은 항상 “프리미엄, 프리미엄 브랜드…….”였다. 그는 말한다. “우리에게는 BMW의 사업방식에 적합한 두 브랜드가 있다. 우리는 럭셔리 자동차를 규정한 롤스로이스 브랜드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의 기본적인 특성이 손상되지 않도록 재원과 기술, 프로세스를 지원할 것이다. 미니는 소형차 시장에서 확실하게 자리잡은 프리미엄 자동차이다. 이것은 세계의 여타 브랜드가 따라갈 수 없는 독특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BMW는 이 두 브랜드를 소유함으로써, 다른 회사들이 모방할 수 없는 이미지와 특성을 갖게 되었다. BMW에게 있어 이것은 브랜드 가치와 브랜드 경영의 요체이다.”

최강 수소자동차의 미래
― 액화수소를 에너지로 사용하는 미래의 자동차 BMW 745h의 전망
BMW는 7시리즈의 한 모델을 미래의 자동차로 만들고 있다. BMW 745h가 그것이다. 745h는 액화수소를 에너지로 사용한다. BMW만이 미래형 자동차로서 수소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BMW는 다른 종류의 수소에너지가 아닌 ‘액화수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고유하다.
BMW 브랜드는 이미 평범한 다른 브랜드와 구별되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수소시대만이 유일한 위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100년 뒤에는 수소가 석탄, 석유, 천연가스 같은 화석원료를 대체하여 인간의 빛, 난방, 이동성의 주요 원료로 사용될 것이다.
하지만 수소연료 전지 자동차를 운전해본 사람들은 엔진 회전과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똑같은 성능과 느낌, 자동차의 피드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BMW는 이것을 잘 파악하고 있으나, 대담하게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제너럴모터스, 다임러크라이슬러 등 다른 자동차회사들이 재충전이 용이한 수소연료전지(수소로 동력을 얻는 전기 배터리)로 운행되는 전기자동차를 연구하는 동안, BMW는 액화수소와 휘발유/디젤의 이중연료 엔진을 사용하여 내부 연소엔진(ICE)를 영속시키는 전략을 독점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들은 앞으로는 수소 연료만을 사용하는 내부연소엔진을 개발할 계획이다. 하지만 고객들의 편의를 위한 수소 충전소의 기반시설이 구비될 때까지, BMW는 2005년이나 2006년경부터 소규모로 이중연료 차량을 시장에 내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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