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스테르담 "

2016. 6. 30. 11:07독서

 

 

 

 

 


세계 최초 주식시장의 탄생,

램브란트와 동시대 화가들로 대표되는 비종교적 미술의 발달,

관용이라는 혁신적인 공식 정책의 수립,

유럽 전역의 사상가들을 끌어들이고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출판 중심지를 만들어낸 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

도시의 물리적인 변화를 가져온 저 유명한 암스테르담 운하망의 건설,

심지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사적인 공간으로서의 '집' 이라는 개념의 기원이 된 카날하우수,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과 경영혁신을 이훈 동인도회사 서인도회사 등... 그 모든 수식어의 주인공이 바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다.


책이 너무 재밌어서 인용 바로 전 페이지 528쪽까지 읽은후 바로 돌아 처음부터 다시 정독했다, 꼭 풀코스 마라톤 반환점 돌듯이...

책의 내용은 암스테르담의 현재부터 최근→ 과거 →근대→ 현대로 이어지는데 맨 끝내용이 맨 앞과 연결되어 있어서 두번 읽을땐 더 미러속에 쏙쏙 들어왔다.

이 책은 내용도 의미있고 중요하지만 문체가 아주 흥미로웠다. 작가의 글솜씨가 돋보이는 문장들만 뽑아 아래에 적어 보았다.




 

그중 몇몇 집은 이곳 사람들의 뼛속 깊은 개방성에서 나왔을 거라고 내 멋대로 추측하는 네덜란드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커튼 없는 창문을 통해 거실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구겨진 수건이라든가, 간간히 낯선 사람과의 섹스 말고는 종일 길거리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 뿐인 지루한 하루를 예상하는 여자의 무료한 표정. 이런 풍경들이 이곳의 악명 높은 '악덕에 대한 관용'을 선정적이고 이상적인 세계에서 분리해 지극히도 일상적인 세계 속으로 옮겨 놓는다.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한동안 살다보면 이런 특색이 평범함의 무게에 눌려 곧 사라져버린다.


그의 조국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기를 쓰고 그를 외면하더니, 더 이상은 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의 이름에는 부르조아적인 무게감이 없었다. 그것도 그렇거니와, 두껍게 휘저어놓은 그 화사한 색깔들이 세월의 시험을 견뎌내고 살아남을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


만약 거기에 찾아갔다가 너무 긴장해서 홍등가 여성에게 어떻게 일을 줄 수 있는지 감을 못 잡겠다면, 순찰 중인 경찰에게 도움을 청하면 된다

헤도헌 gedogen 은 '엄밀히는 불법이지만 공식적으로 용인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미친도시라는 말이 맞다. 때로 순전히 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대혼란의 무게만으로 세상이 멸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1년 내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조금 더 확장하면, 자유주의가 바로 암스테르담에서 태동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주장에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먼저 반박해 보겠다.


이 모든 것, 암스테르담의 비옥하고 영양가 풍부했던 전선기의 열매들이 끓을 만큼 끓고 농축되어 그 정수가 중류된 것이 스피노자의 철학이다.

그러나 다문화주의는 실패한 정책이 되고 말았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 대신 서로 담장을 맞대고 살지만 철저히 단절되어 있는, 계토화된 공동체만 다수 존재하는 사회, 말하자면 '사회'와 반대되는 것을 낳은 것이다.


이 책이 어쩌면 정치적 기술서로 읽힐 수도 있겠으나, 부디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이건 나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인데, 이 곳을 고향이라 부르게 된 한 미국인 작가의 삶 또한 아주 사소하게나마 선보일 것임을 미리 말해두는 바다.


사랑과 권력에 대한 키키의 개인적인 생각은 그녀의 결혼생활을 끝내는 데 한몫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해 키키네 오래된 건물의 2층 거실을 서성이며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사실 그 시간의 대부분은 암스테르담의 역사를 반추하기보다 내 인생이 지금 얼마나 어이없는 상태인지 곱씹으며 보냈다. 키키의 건물은 그 두 가지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위치에 있었다,


" 비명을 지르고 눈물 흘리며 울부짖는 꼴로 전략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 " 야곱손이 이렇게 쓴 것이 형제들에게 연민을 느껴서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나약한 모습을 보인 것을 변명하려 그런 것인지,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이와 대조되게 암스테르담은 인류의 정착을 극도로 어렵게 만든 척박한 지리 환경 때문에 기원후 1100년경, 바닷물이 매년 해안선을 새로 그리는 것이 지겨워진 농부 수백 명이 질퍽한 늪지를 자기들 집터로 삼고는 그 가장자리에 흙으로 제방을 쌓기 시작할 무렵에 비로소 도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모두 이 "멍청함"을 한 번씩 저질러봤다. 자원을 고갈시켰고, 임의로 자연환경을 변형시켰으며, 개인주의를 높이 처주되 협동이 필수적인 상황에 스스로를 처하게 만들었다. 모두들 개인의 자유를 요구하지만, 반드시 남과 함께 일해야 하는 것이다.


대체로 네덜란드 요리는 애석한 평판을 받아도 마땅한 수준이지만...

 

1517년 독일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자신이 작성한 95개조 의견서를 비텐베르크에 있는 슐로스 성당 문에 못 박으면서 종교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고, 그 불길이 서쪽으로 650킬로미터를 달려와 마침내 중세 암스테르담의 성벽에 와서 부딪혔다.


루터는 역병 같은 존재지만, 에라스뮈스는 더하네. 루터가 그 독을 에라스뮈스의 젖꼭지에서 빨아들인 것이거든


국명이 암시하듯 신성로마는 혈통을 고대 로마로부터 물려받았으며, 그놈의 혈통은 그들이 가톨릭계 속국들에 휘두르는 권력을 정당화할 때 항상 내새우던 무기이기도 했다. 사실 그게 정당화의 수단이 될 수 없었던 것이,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 혈통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라는 볼테르의 유명한 비꼼이 대체로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신성로마제국에 포함된 적이 없었을뿐더러, 제국의 황제들은 바티칸과 끊임없이 대립했다


역사적으로 한 시대가 이지러지고 새로운 시대가 탄생하는 순간에 늘 그렇듯, 경악스러울 정도의 추악함과 갈등, 혼돈의 시기가 펼처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펠리페 2세가 가진,그의 부친에게는 없었던 한 가지인 뜨거운 기독교 신앙은 그의 긴 치세에 재앙과도 같은 화력을 덧입히고 말았다.


펠리페 왕에게서 우리는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의 진정한 융합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융합의 결과는, 현대용어로 정신병이라 부르고 싶은 모습이었다.(펠리페 왕이 자주 내세운 정당화는 어떤 일을 시킬 때 그것이 " 신의 뜻이자 곧 나의 뜻대로 하라. 결국 둘은 같은 것이니 " 였다)


이렇게 해서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 사회를 구성하는 세 계층의 무시 못할 수가 역사상 최초로 한편으로 뭉치게 만드는 드문 위업을 달성하고 말았다,


천국이 어딘지는 몰라도 그들이 있는 곳이 지옥임은 분명했다


어떤 형태든 경제 혁신의 발화점은, 슘페터의 말대로 언제나 똑같다. 소수의 특정집단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소수의 혁신가 집단은 거의 항상 현 기득권측에 속해 있지 않다. 기득권층은 현 체계를 바꾸려 들 이유가 없으니까. 소수의, 베짱 있는 신참자들이 기회를 포착하고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 모든 광경에 가려져 있던 전반적인 경험 부족은 원정대의 시야에서 텍설 섬과 네덜란드 영토가 사라진 순간부터 그들이 마침내, 믿기지 않게도, 야자수 가득한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까지, 희극과 비극이 교차된 어설픈 갈지자 여정의 모든 국면에서 하나씩 드러났다.


그러나 데 하우트만의 첫번째 원정은, 그 여정이 보여준 블랙코메다와 어이없을 정도의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전혀 동떨어진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기에 그래도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홀란트가 홀란트였던 이래로 이렇게 풍성하게 물건을 싣고 온 배는 처음이로군


거기에 참 겸손한 제목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 암스테르담, 홀란트 주 제 1의 도시이자 온 유럽이 칭송하는 최대의 상업 중심지' 라는 뜻의 라틴어 문구다. 데 하우트만이 귀향한 지 2년밖에 안 지났는데 암스테르담은 상당히 네덜란드답지 않은 허풍으로 스스로를 과대포장해 선전하고 있었다.


VOC의 천재성은, 이 고도로 발달한 복잡한 네트워크에 비집고 들어가 누비고 다녔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한 세기가 흘러 황금기가 저물어갈 무렵, 네덜란드는 향신료를 유럽 국가들뿐 아니라 오히려 중국,인도,심지어 향료 군도의 주민들에게까지 팔고 있었다.


이 항구에 들어온 배들이 운하를 타고서 지금 거기 서 있는 여러분의 엉덩이를 툭 건드릴 정도로 깊숙이 들어왔던 것을 감안하면, 여러분이 서 있는 교각, 뉴브리지는 암스테르담을 이루는 두 영역, 바다와 육지를 잇는 관문이었던 셈이다.


암스테르담 주식거래소의 정식 명칭이 된 NYSE 유로넥스트는, 공식 웹사이트의 설명과 내가 그 건물 로비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말을 튼 경비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유서가 깊은 주식거래소다


하지만 이 모든 조건을 완수할 능력을 가진 화가를 외과의사조합이 어디에서 찾아낸단 말인가 ?

그 화가를 그들은 레이던에서 찾아냈다. 정확히 말하면, 물방앗간 주인과 빵장수 딸 사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쭉 살고 있던 그를 발견했다.


만약 이 해석이 맞는다면, 램브란트는 지금은 흔하지만 그 당시에는 거의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실행했던 셈이다. 작품을 자신의 감정적 욕구를 표출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 말이다

 

이렇듯 새로운 등장에 대한 충격은 램브란트의 친구였던 콘스탄테인 하위헌스가 램브란트의 그림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약간 홀린 듯한 경외 어린 어조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고루한 암스테르담 주민들이 어째서 그런 적나라한 인간 내면세계를 경악스러우리만치 부적절하거나 혹은 외설적인 것이 아닌, 얼른 붙잡고 음미해야 할 경이로 받아들였는지, 한번 탐구해볼 만하다.

 

유대교 원로들이 스피노자를 공동체에서 내쫒은 데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해도, 그들의 결정에 다소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17세기에는 모두가 특정한 신앙 집단에 속해 있었다. 교회나 유대교 회당은 그저 예배나 보러 일주일에 몇 번 가는 곳이 아니였다, 그 사람이 몸담은 공동체였고, 사회가 보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자 합법성의 기본적인 일부였다.

 

영토의 상당 부분을 침략자들의 진입을 막기 위해 일부러 침수시켜야 했고, 그곳은 물에 잠긴 늪지로 돌아가 나라의 풍경이 퇴화되었다.

 

이런 암스테르담의 자유주의가 다방면에서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으며 그로 인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또한 여러모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후반부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물론 도시라는 것은 정해진 형태가 없고 한 도시가 끼치는 영향은 그 형태를 이야기하기가 더욱 어렵다, 관념은 나비처럼 붙잡아서 핀으로 고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수천 명이 그랬듯, 로크도 암스테르다을 은신처로 선택했다.

 

제퍼슨을 로크를 "예의없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 인물 중 하나" 로 간주한다고 못을 박음으로써 로크에게 진 빚을 우회적으로 시인했다

 

역사는 빌럼 3세의 잉글랜드 왕 즉위를 영국이 그를 '초대' 했기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록했다.그 말에 일리가 있지만 오해의 소지도 있다.

 

윌리엄이 이끈 네덜란드군의 영국 침략은 훗날 '명예혁명' 이라는 이름으로 거창하게 재명명되면서 하고많은 사건들 중에 조금 더 중대한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암스테르담 바깥 지역의 낙농업자들이 와서 간이 판매대를 차리고 네덜란드 요리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그 조그만 노란 조각을 한 통씩 팔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들은 몸을 팔았고, 남자아이들은 좀도둑이 되었다. 그리고 두 경우 다 운 나빠서 경찰에 걸리면, 자유주의 정부란 결국 자본주의 체제의 사주를 받는 깡패였구나 하고 절망하게 만들 정도로 엄종한 처벌을 받았다

 

정통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 중에 헤르만 호르터르라는 선동가가 있었는데, 나는 이 사람에게 이 책의 몇 단락을 꼭 좀 할애하고 싶다, 정말 흥미로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대학 가서 우연히 만나 하룻밤 이야기 나눈 것으로 십년지기 못잖은 친구가 됐다가 다음 순간 평생 피해 다니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이다.

 

호르터르는 한번 교단에 섰다가 짜증나는 학생들을 견디지 못해 때려치웠을 뿐, 평생 노동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도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혁명과 경제 정의 이론이야말로 영험하고 절대적인 진리라고 굳게 믿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에 또 감동을 받아, 설익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또 다른 작품을 탄생시켰다

 

서로 목청 자랑만 한 논쟁의 열기가 한 뜸 가라앉자, 헤르만 호르터르와 강경파 사회주의자들은 더 이상 암스테르담에서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됐고 점차모습을 감추었다

 

암스테르담의 자유주의는 다양한 궤도를 통해 새 시대를 맞이했다. 그중 하나를 지금부터 추적해보려 한다. 그러려면 앞에서 소개한 인물 중 한 명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

 

실제로, 20세기 후반에 이르자 앞서 말한 유의 종교적 자유는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피임 교육을 십대 청소년들에게 당연한 것처럼 시키는데, 유명한 '더블 더치' 피임법, 즉 여자애들은 경구피임약을 먹고 남자애들은 콘돔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전 세계 최저의 십대 임신율과 최저의 낙태율을 이끌어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한편 히르시 알리는 워싱턴의 미국기업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해달라는 초대를 수락하고, 그녀 자신이 뇌관을 건드려 폭발시킨 논쟁의 낙진을 피해 미국으로 가버렸다.

 

이런 심각한 질문에 제대로 답하려면,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상책이다. 어느 도시든 형편없는 미술 작품을 몇점씩은 보유하고 있다.

 

인권과 자유의 한계를 최대한 시험하려는, 그리고 자유주의 이상을 위해 그들이 어떤 짓까지 불사할 수 있는지 시험하려는 갸륵한 의도는 이렇게 몇 세대를 놀려먹어도 모자할 헛웃음 나는 프로젝트를 여러 개 낳았다

 

잠시 후, 한 팔에 앤서니를 안은 나는, 두 손으로 내 다른 쪽 팔을 꽉 붙잡고 그동안 억눌러온 오만 가지 감정을 토해내는 프라다를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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