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된 도시의 골목길을 걷다 "

2013. 9. 10. 09:42독서

 

 

 

 

 

 

 

나같은 문화 짠돌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소장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건 극히 드문 일인데 이 책이 그랬다

건축가만 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재능을 가진 한필원님

왠만한 소설보다 훨씬 흥미진진하게 문장을 구성하고 해박한 지식 사이사이에 해학을 박아놓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님과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이런 책은 사줘야 한다는게 저자의 노고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고

그런 분들이 더 오래오래 한국에서 활동해줬으면 하는 오지랖의 발로이다.

 

책은 밀양,통영,안동,춘천,안성,강경,충주,전주,나주의 순서대로 9개의 역사도시와

특집으로 「한국의 역사도시를 말한다」「키워드로 읽는 도시 답사 노하우」를 뒤에 실었다

난 먼저 뒤편 특집부분으로 돌아가 저자의 집필의도와 키워드로 무장한 후에

내가 좋아하는 도시 순서대로 지그재그 읽기 시작했다

 

 

「한국의 역사도시를 말한다」

   20세기 후반 이래 우리들은 도시의 양적 성장에만 관십을 기울였지 그것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공간과 우리의 삶이 주고받는 관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정작 도시에 살면서도 늘 전원생활을 꿈꾸며 자신의 삶이 영위되는 공간에 무관심하고 외면하기까지 한다. 휴일만 되면 대도시를 빠져나가는 차량 행렬이 그런 현실을 대변한다.

   전형적인 서유럽의 도시 공간은, 공적 공간인 너른 중정과 그것을 둘러싸는 중고층 집합주거 복합건물의 일정한 블록들로 이루어진다. 주요 거리와 그 안쪽 이면도로가 함께 격자를 이루며 집합주거 블록의 중정을 둘러싸는데, 규모나 용도에서 두 부류의 길들에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두 부류의 길에 면한 건물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와 달리 동아시아 도시에서는 주요 가로들에 의해 도시 공간이 블록으로 나뉘고, 블록 내부는 골목으로 조죅된다.. 여기서 두 부류의 길과 그 길에 면한 건물들에는 규모나 용도에서 큰 차이가 나타난다. 그래서 서구의 도시는 통일성이 강해 보이고 동아시아의 도시는 매우 복잡해 보인다.

 

「키워드로 읽는 도시 답사 노하우」

   셩벽의 동서남북 4곳 또는 동서쪽과 남쪽 등 3곳에 성문을 설치했고, 성문 바깥으로 그것을 감싸는 옹성을 설치했다. 성문들 가운데 도시의 공식 정문인 남문과 일상생활에서 주 출입구 역활을 하는 동문의 모습을 보면, 대개 높은 석축 위에 중층의 누각을 세워 그 위용을 자랑했다. 이에 비해 북문과 서문은 좀 더 간략한 형태로 지어졌다

   과거에는 읍성의 정문인 남문과 북문 또는 객사를 잇는 남북가로를 따라 관청이나 큰 규모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동문과 서문을 잇는 동서가로는 일상적인 동선의 축으로,과거부터 그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가로였다

 

각 역사도시에 대한 글의 구성은 이렇다

도입부에서는 그 도시의 과거 역사를

다음에 본인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로 흥미를 돋구고

그 도시 고유의 건축 특징을 절묘하게 끄집어 내어 주제로 삼고

도시의 개선할 점들에 대해 미래지향적인 조언으로 마무리 되어 있다.

 

「안성」

   안성을 걸으면서 받은 느낌은 근대기에 조성된 대도시 대전의 가로를 걷고 나서 더욱 뚜렷해졌다. 한마디로 안성의 가로는 인간에게 편안함과 긍정적인 느낌을 주었다. 우리 역사도시에서 느끼는 그런 인간적인 도시공간의 분위기를 '도시의 휴머니즘'이라 표현하고자 한다. 새로운 시대에 도시가 나아갈 방향은 '유비쿼터스'니 뭐니 해서 고도의 기술로 기능을 극대화하는 도시가 아니라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도시, 곧 휴머니즘의 도시라고 생각한다. 도시 공간에 쓰레기가,심지어 애완견과 아이들마저 버려지는 상황이라면, 살면서 정나미가 떨어져 걷기조차 싫은 도시라면, 극도의 편의성과 효율성은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가 ?

「강경」

   금성다방은 서양의 벽돌조나 석조건물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뼈대가 나무로 된 목조건물이었는데 갑자기 철거된 서연이 황당하다. 문화재청은 2001년,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근대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등록문화재 제도를 도입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금성다방 건물에 문화재 등록을 예고했는데 주인이 바로 다음 해에 건물을 철거해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화재 보호제도가 잘 쓰던 건물의 수명을 단축시킨 셈이다. 그 금성다방이 남아 있었다면 우리가 오래된 다방을 찾느라 애쓰지 않았을 테고, 충남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의 커피라며 대도시 커피 전문점의 2배 가겨을 받았어도 우리는 감사하며 마셨을 것이다. 근대의 풍경을 담은 커피는 흔치 않을 테니, 그 커피 맛은 제값을 했으리라.

「전주」

   최담은 전주 한옥마을에 전주 최씨의 종대와 종가를 조성한 사람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살림집만이 아니라 흔히 별서라고 부르는 별도의 공간을 갖춰야 제대로 거처를 정했다고 보았는데, 최담은 한벽당을 지음으로써 그런 사대부의 생활관을 앞서 실천했다

   한벽교를 한벽당에서 조금만 떨어뜨려 놓았어도 한벽당이 이렇게 시각적,청각적으로 완벽히 지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층아파트를 짓는다는 팻말만 세워도 돈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들어왔던 개발독재시대에 한벽당이라는, 아파트단지 노인정보다도 작은 정자가 불도저의 방향을 돌여놓을 수는 없었으리라. 도시에서 자본의 힘을 전통이나 문화가 막아내기는 매우 어렵다,. 문제는 도시에서 자본의 승리는 곧 인간의 패배라는 사실이다.

「안동」

   홍건적의 2차 침입때(1361년) 공민왕은 안동, 당시 복주(福州)로 피난했다, 복주 사람들은 피난온 왕실을 정성을 다해 받들고 많은 군사를 동원해 개경 수복을 도왔다, 당시 복주 사람들의 충성심을 말해주는 전설이 있다, 충주와 문경새재를 거쳐 예천을 지나 복주로 향하던 공민왕과 왕비 일행이 다리가 없는 시내를 건너게 되었다. 추운 겨울 왕살이 남감한 상황에 처했을때 복주의 부녀자들이 시내로 뛰어들어 허리를 구부려 사람다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노국공주(원나라 위왕의 딸로 공민왕과 결혼하여 왕비가 됨)는 그것을 밟고 시내를 무사히 건넜다. 이것이 안동지방에서 전승되는 놋다리밟기의 기원이다.

「충주」

   충주는 경기도와 영남과 왕래하는 길의 요충에 해당되므로 유사시에는 반드시 서로 점령하려는 곳이 될 것이다. 실제로 온 나라의 한복판이 되어서 중국의 형주,예주와 같은 까닭에, 임진년에 신립이 왜적에게 패전한 곳도 이 지방이었다, 그리하여 常時에도 殺氣가 하늘을 찌르며 해가 빛이 없다. 지세가 서북쪽으로 쏟아지듯 하여 정기가 머물러 쌓이지 않으므로, 부유한 자가 적고 백성은 많으나 항상 口說이 많고 경박하여서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 이중환 <택리지>

   용산에는 王氣가 있어 고구려와 백제시대에는 산 위에 작은 못을 조성하고 석탑을 건립하여 충주의 地脈을 단절했다고 한다.

「춘천」

   서부시장길 남쪽에서 소양강 바람을 맞던 춘천고등학교는 졸지에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군부대와 마주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 이 고등학교를 다닌 소설가 산수산은 <춘천, 마음으로 찍은 풍경>에서, 도서관 옆 옥상에 올라 바라본 춘천의 풍경은 "어린 마음에 첣없는 반미감정을 키우기에" 적절했다고 회고한다, 그의 후배들도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밤늦게 교문을 나설 때 서점이나 문구점의 백열등 대신 음탕하게 웃는 빨간 불빛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도 땅거미가 내릴 때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언제나처럼 자욱한 안개가 도시를 떠나는 나를 배웅한다. 그러고는 도시를 잠재우려는 듯 춘천분지를 덮기 시작한다. 안개속에 잠드는 춘천, 참으로 사랑스럽다 !

「통영」

   높낮이 변화가 큰 주거지가 부두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어촌마을의 모습이다. 이런 곳이 농촌마을이 되기는 어렵다. 높은 곳에 있는 집으로  무거운 농기루와 농작물을 수시로 들이고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닷가 어촌마을은 이런 입지를 선호한다, 해일을 피할수 있고 생업의 터전인 바다를 늘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에 있든 주변에 있든 통영의 집들은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도 바다로 모인다. 해 질 녂이면 통통배들이 쇠붙이가 자석에 이끌리듯 얌전하게 부두로 들어온다. 그 배들을 이끄는 것은 바다로 향했던 시선들이다. 시선의 이끌림을 받지 못한 늦은 배들만 북포루의 불빛에 의지한다.

「밀양」

   밀양강에 의지해 도시를 만든 사람들은 밀양강변을 상징적인 건축의 장소로 삼았다. 가장 양기 어린곳에 웅장한 남성미를 자랑하는 누각인 영남루를, 가장 음기 서린 곳에는 아랑사를 지었다. 아랑사는 영남루로 달구경을 나왔다가 치한의 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대숲에 버려진 밀양부사 딸, 아랑의 원혼을 달래는 사당이다. "날 좀 보소" 로 시작해 "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벽공에 걸린 달은 아랑각을 비치네" 로 끝나는 경쾌한 가락의 밀양아리랑은 이런 도시의 역사를 말해준다

   그 건물 1층 옷가게의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었지만 역시 세 든 집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 왜 그것이 궁금할까 ?' 하는 표정이었다. ' 한 도시에 살면서 왜 그것을 모를까 ? '나도 의아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서성이며 여러 사람에게 들은 대답은 이렇다. " 머꼬 ? 우데 ? " 왜 자꼬 물어사아 ? " 그건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나주」

   왕건은 각 지방의 토족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평생 2년에 한 번꼴로 결혼을 하여 29명의 아내를 맞아 25명의 아들을 두었다

   번듯한 역사, 지배권력의 유산만을 복원하고 실제로 도시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남긴 일상의 역사는 쉽게 지워버리는 것이 어느새 하나의 관행이 되었다, 복고적 개발주의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방식은 문화의 진정한 역사성,장소성,일상성을 왜곡하거나 말살하는 결과를 낳았다. 생각해보라, 급하게 새로 쌓은 번듯한 성벽에서 어딘지도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는 돌들이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지, 여러 시대의 삶이 복잡다단하게 기록되어 았는,무너져 버린 성벽과 그 위의 집들처럼 새로 쌓은 돌들도 우리에게 진정한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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